三一運動


3.1만세운동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3.1운동, 그녀들이 지켜낸 조국"

3.1운동이란?

시위횟수 : 1,542회
참가인원 : 약 200만명 (당시 인구 약 2,000만명)

3·1 운동 또는 3·1 만세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위키피디아 참조)




"3.1운동 의의"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것은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저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1운동 당시의 유관순 열사


유관순은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만류하는 프라이 교장선생님 등을 뿌리치고 학교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3월 2일 학생대표들이 이화학당에 와서 3월 5일 학생단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고했다. 유관순과 5인 결사대는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도 참여했다. 이날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지금의 남산에 있었던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 외국선교사들이 아이들을 내 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자 국제여론을 일으킬 수 있는 외국인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유관순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3월 10일을 기해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